
균열 (龜裂)
4화 — 손목
· · ·
준혁이 학교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퇴원 후의 일상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다. 편의점 새벽 근무, 학교, 그리고 다시 새벽 근무. 능력이 생겼다고 해서, 그 일과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교실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트럭에 부딪혔다는 사실을 화제로 삼지 않았다. 낙산고에서는 누군가 다쳐 사라졌다 돌아오는 일이, 그리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다들 자기 삶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준혁은 그게 차라리 편했다.
그는 늘 그랬듯 교실 뒤쪽 구석에 앉아, 말을 아끼고 표정을 아꼈다. 능력이 생겼다고 해서, 그 원칙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더 철저해져야 했다.
준혁은 며칠 동안 자신을 단속했다. 무거운 것을 들 때는 일부러 두 손을 썼다. 계단을 오를 때는 의식적으로 속도를 늦췄다. 체육 시간에는 적당히 뒤처졌다.
능력은 알려지는 순간 표적이 된다. 그 원칙을 지키려면, 평범한 척하는 연기를 매 순간 해야 했다.
강한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했다.
준혁은 그 사실을, 산을 내려오던 그 새벽에 이미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결심이 처음 시험대에 오른 것은,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 · ·
준혁이 매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복도 끝, 창가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성재였다.
준혁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평소처럼, 벽 쪽에 붙어 그 옆을 지나가려 했다. 끼어들지 않는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게 준혁이 3년간 지켜온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방식이 통하지 않았다.
박성재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오지민이었다.
"핸드폰 좋네."
박성재가 지민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 지민의 핸드폰은 최신 기종은 아니었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물건이었다.
"잠깐 빌리자. 게임 하나만 깔게."
"돌려줘."
지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돌려줘? 뭘 그렇게 빡빡하게 굴어."
박성재가 핸드폰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키 차이로, 지민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이였다.
준혁의 발이 멈췄다.
복도 한가운데였다. 지나가던 학생 몇이 멀찍이서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끼어들면 다음 표적이 되니까. 그건 준혁이 누구보다 잘 아는 계산이었다.
준혁은 그 자리에 서서, 짧은 사이 머릿속으로 계산을 돌렸다.
끼어들면, 박성재는 핸드폰 대신 준혁을 표적으로 삼는다. 매일 시달리게 된다. 알바를 빠지게 되고, 월세가 밀리고, 결국—
늘 하던 계산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계산의 끝이 평소와 달랐다.
준혁의 머릿속에, 한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능력이었다. 왼쪽 눈이, 가까운 미래를 보여주고 있었다.
박성재가 핸드폰을 바닥에 던진다. 액정이 거미줄처럼 갈라진다. 지민이 깨진 핸드폰을 주워 든 채, 고개를 숙인다. 어깨가 떨린다.
준혁은 그 장면을 봤다.
그리고—
발이 움직였다.
이번에도, 생각보다 몸이 먼저였다. 육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 · ·
"야."
준혁의 목소리가 복도에 떨어졌다.
박성재가 고개를 돌렸다. 들어 올렸던 핸드폰을 그대로 든 채.
"…뭐야?"
박성재는 준혁을 알아보는 데 잠깐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준혁은, 이 학교에서 존재감이 없는 학생이었다.
"이준혁? 너 죽고 싶냐?"
구경하던 학생들이 술렁였다. 존재감 없던 뒷자리 학생이, 일진 앞에 나서는 일은 흔치 않았다.
준혁은 박성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표정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분노도, 두려움도, 흥분도. 그저 해야 할 말 하나만 담겨 있었다.
"핸드폰 돌려줘."
박성재의 얼굴이 굳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빠른 답은 폭력이라는 걸, 박성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본보기. 한 명을 확실히 꺾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입을 다문다.
박성재의 주먹이 날아왔다.
빠른 펀치였다. 싸움에 익숙한 자의 주먹. 보통의 열일곱이라면, 그대로 얼굴에 맞았을 거였다.
그런데 준혁의 눈에—
그 주먹의 궤적이, 보였다.
왼쪽 눈이 미래를 보여줬는지, 아니면 단지 신경이 빨라진 것인지, 준혁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눈에는 주먹이 지나갈 경로가, 선처럼 또렷하게 그려졌다.
준혁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오 센티미터. 딱 그만큼.
박성재의 주먹이, 준혁의 귀 옆을 스치고 허공을 갈랐다.
박성재의 눈이 커졌다.
그는 다시 주먹을 들었다. 빗나간 게 우연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번엔 준혁이, 먼저 움직였다.
준혁의 오른손이, 박성재의 손목을 잡았다.
그저 잡았을 뿐이었다. 비틀지도, 꺾지도 않았다. 그냥 손목을 감싸 쥐었다.
박성재가 팔을 빼려 했다.
빠지지 않았다.
박성재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이 스쳤다. 그는 덩치가 컸고, 힘으로 밀린 적이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자기 손목을 쥔 그 손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박성재가 온몸의 힘을 실어 팔을 당겼다.
준혁의 손은, 마치 벽에 박힌 쇠고리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 · ·
준혁은 그 순간, 자기 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힘을 주는 게 아니었다.
힘을 빼는 거였다.
편의점 박스를 받쳤던 손. 산 아래까지 돌을 던졌던 손. 그 손이 지금 사람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준혁은 산에서 내려오며 했던 생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손이 사람에게 닿으면 어떻게 될지. 휘두르는 것보다 멈추는 것이 더 어려운 힘이라는 것.
그래서 준혁은, 박성재의 손목을 잡은 그 손에서—
힘을 거의 다 빼고 있었다.
딱,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만. 그 이상은 단 한 톨도 더 주지 않았다.
조금만 더 힘을 줬다면, 박성재의 손목은 그 자리에서 부러졌을 것이다. 준혁은 그것을 알았다. 알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게 힘을 다스렸다.
강한 사람일수록, 더 조심해야 했다.
그 원칙을, 준혁은 지금 자기 손끝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놔."
박성재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놓으라고!"
"핸드폰."
준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평온했다. 마치 날씨 이야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때, 박성재의 패거리 중 하나가 옆에서 달려들었다.
준혁의 왼발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저 발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차거나 걸어 넘어뜨리려 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달려들던 그 학생은, 준혁의 발에 발목이 가볍게 닿은 것만으로 균형을 잃고 복도 바닥에 미끄러졌다.
복도가 조용해졌다.
구경하던 학생들이, 숨을 죽였다.
준혁은 박성재의 손목을 쥔 채, 다시 한 번 말했다.
"핸드폰."
박성재의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준혁의 왼손이, 그 핸드폰을 떨어지기 전에 받아냈다.
준혁의 눈이, 그것이 떨어질 자리를 미리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혁은 박성재의 손목을 놓았다.
박성재는 풀려난 손목을 반대 손으로 감싸 쥐었다. 부러지지도, 멍들지도 않은 손목이었다. 아무 상처도 없었다. 그런데 박성재의 얼굴은,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게 한 대 맞은 사람 같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분노 안쪽에,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당혹이었다.
박성재는, 자기 손목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고 봐."
박성재는 그 말만 남기고, 패거리를 데리고 복도를 빠져나갔다. 미끄러졌던 학생이 황급히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준혁은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 · ·
"…야."
지민이었다.
준혁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지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혁을 보고 있었다.
"너… 방금 뭐 한 거야?"
준혁은 손에 든 핸드폰을 지민에게 내밀었다.
"여기."
지민은 핸드폰을 받으면서도, 시선은 준혁의 얼굴에 그대로 둔 채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 방금… 박성재 손목 잡았는데 걔가 못 움직였잖아. 그리고 김재호가 달려드는데 너 발만 슬쩍 댔는데 그대로 자빠졌어. 그리고 핸드폰… 안 보고 받았어. 등 뒤에서 떨어지는 걸."
준혁은 잠깐 말이 없었다.
지민은 영리한 아이였다. 본 것을 본 대로 정확히 짚어내는, 그런 아이.
준혁의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능력은 알려지는 순간 표적이 된다. 그게 그의 원칙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원칙이 처음으로 위태로워졌다.
하지만 준혁은, 거짓말을 길게 늘어놓지 않았다. 거짓말은 길수록 빈틈이 많아진다는 걸, 그는 알았다.
"운동 좀 했어."
준혁은 짧게 말했다.
"운동? 너 알바하느라 운동할 시간도 없잖아."
"…사고 나고 입원했을 때, 재활 운동 했어."
지민은 그 대답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입을 살짝 벌리고, 무언가 더 물으려 했다.
준혁은 그보다 먼저 걸음을 옮겼다.
"점심시간 끝나겠다. 들어가자."
지민은 잠깐 그 자리에 서서, 준혁의 뒷모습을 봤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더 캐묻지는 않았다.
지민은 그런 아이였다. 친구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기다려주는.
준혁은 그 침묵이 고마웠다.
· · ·
그날 밤, 준혁은 옥탑방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다.
눈을 감으면, 낮의 장면이 다시 재생됐다.
박성재의 손목을 쥐던 감각. 거기에 저항이라곤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손목을 쥐는 것 같았다. 마음만 먹었다면, 준혁은 그 손목을 종잇장처럼 부러뜨릴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준혁을 오래도록 깨어 있게 했다.
그는 오늘, 능력을 썼다.
숨기겠다고 결심했던 능력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능력을.
준혁은 자기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후회하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은, 아니었다.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만약 끼어들지 않았다면, 지민의 핸드폰은 지금쯤 액정이 갈라져 있었을 거였다. 능력이 보여준 그 미래대로.
준혁은 그 미래를, 자기 손으로 바꿨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혁은 처음으로 어렴풋이 느꼈다.
능력이라는 건, 단순히 숨기고 끝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눈은 미래를 보여준다.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미래를 바꾸려면, 결국 손이 움직여야 한다. 발이 움직여야 한다.
본다는 것과, 바꾼다는 것.
그 둘은 다른 일이었다.
준혁은 천장을 보며, 오래 생각했다.
그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그랬다. 그가 원하는 건 작고 평범한 삶이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순간이, 앞으로 또 올 거였다. 눈이 무언가를 보여줄 거고, 그때마다 준혁은 선택해야 할 거였다. 못 본 척 지나갈 것인가. 아니면—손을 쓸 것인가.
준혁은 아직, 그 답을 정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박성재는, 이대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두고 봐."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낙산고에서 박성재 같은 부류가 체면을 잃으면, 반드시 되갚으려 한다. 그것도 더 크게, 더 비열하게.
준혁은 눈을 감았다.
습관처럼, 내일을 보려 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흐릿했지만, 분명히 보였다.
학교가 끝난 뒤의 골목. 준혁이 알바를 가려고 늘 지나는 그 길.
그 골목에, 여러 명이 서 있었다.
준혁을 기다리는, 여러 명이.
· · ·
5화에서 계속.
'균열 시즌1'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웹소설] 균열(龜裂) 6화 — 머리 | 무료 연재 현대 판타지 (0) | 2026.05.19 |
|---|---|
| [웹소설] 균열(龜裂) 5화 — 골목 | 무료 연재 현대 판타지 (0) | 2026.05.19 |
| [웹소설] 균열(龜裂) 3화 — 오른손 | 무료 연재 현대 판타지 (0) | 2026.05.19 |
| [웹소설] 균열(龜裂) 2화 — 눈을 감으면 | 무료 연재 현대 판타지 (0) | 2026.05.19 |
| [웹소설] 균열(龜裂) 1화 — 육교 위에서 | 무료 연재 현대 판타지 (0) | 2026.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