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 (龜裂)
3화 — 오른손
· · ·
퇴원하던 날, 준혁은 곧장 편의점으로 향했다.
입원해 있는 열흘 동안, 준혁의 머릿속을 가장 많이 차지한 건 능력이 아니었다.
일자리였다.
열흘을 결근했다. 사장에게 사정을 설명할 길도 없었다. 핸드폰은 사고 때 박살 났고, 새로 살 돈은 없었다. 그러니 사장 입장에서 준혁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알바생이었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운터에 있던 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준혁을 보는 사장의 얼굴에, 곤란함이 스쳤다.
"야, 너…"
사장이 말끝을 흐렸다.
"연락도 없이 열흘을 안 나왔잖아. 나도 사람을 새로 구해야 했어. 너 자리에—"
"제발요."
준혁이 말했다.
사장의 말이 멈췄다.
준혁은 허리를 숙였다. 90도로.
열일곱 살이 어른 앞에서 허리를 그렇게 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존심이라는 게 그 나이에는 유독 크고 단단했으니까. 하지만 준혁에게 자존심은, 월세 앞에서는 늘 두 번째였다.
"사고를 당했어요. 병원에 있었어요.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준혁은 고개를 숙인 채로 말했다.
"오전이든 새벽이든 상관없어요. 시급 깎으셔도 돼요. 자리만… 자르지만 말아주세요."
편의점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형광등의 미세한 잡음. 사장은 한참 동안 준혁의 숙인 뒤통수를 보고 있었다.
"…고개 들어."
준혁이 고개를 들었다.
사장은 한숨을 쉬며 카운터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새벽. 두 시부터 여섯 시까지. 그 시간대는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서 비어 있어. 할 수 있어?"
"네."
대답에 망설임이 없었다.
새벽 두 시부터 여섯 시. 학교 가기 전, 가장 잠이 필요한 시간. 보통의 열일곱이라면 고개를 저을 시간대였다.
하지만 준혁은, 보통의 열일곱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그랬다.
· · ·
새벽 근무 이틀째였다.
편의점의 새벽 두 시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시간 중 하나였다.
손님은 한 시간에 한두 명. 그마저도 담배 한 갑, 숙취해소제 한 병을 사 들고 말없이 나갔다. 형광등은 지나치게 밝았고, 그 밝음 속에서 준혁은 혼자 일했다.
그는 그 시간이 싫지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보지 않았다. 존재감을 지우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는 시간. 준혁에게 새벽은, 가장 편한 시간이었다.
그날 준혁은 음료 진열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창고에서 음료 박스를 꺼내 와, 냉장 진열대를 채우는 일.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이었다. 캔커피가 든 박스 하나가 특히 무거웠다. 스무 병들이. 양손으로 들어야 하는 무게였다.
준혁은 그 박스를 가슴께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진열대 쪽으로 옮기던 중—
박스 바닥이 미끄러졌다.
테이프가 덜 붙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박스 바닥이 툭 벌어지면서,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렸다. 스무 병의 캔커피가 그대로 준혁의 발등을 향해 쏟아질 참이었다.
준혁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피해야 한다. 발을 빼야 한다. 그런데 늦었다. 박스는 이미 기울었고—
그 순간이었다.
준혁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생각보다 먼저였다. 마치 오른손이 따로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손이 박스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박스가, 멈췄다.
공중에서.
준혁의 오른손 하나에 받쳐진 채로.
스무 병의 캔커피가 든 박스가, 한 손바닥 위에 가만히 얹혀 있었다.
준혁은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편의점 형광등이 머리 위에서 윙윙거렸다. 냉장고가 낮게 돌아갔다. 창밖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준혁은 천천히, 그 박스를 들어 올려봤다.
오른손만으로.
가벼웠다.
아니, 가볍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았다.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스무 병이 든 박스가 마치 속이 텅 빈 종이 상자처럼 느껴졌다.
준혁은 박스를 진열대 위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기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흉터 하나 없는 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트럭에 정면으로 부딪힌 손이었다.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충격을 받은 손. 그런데 그 손에는 상처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부딪힌 적조차 없는 것처럼.
준혁은 그 손을 천천히 쥐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겉으로는, 평범한 손이었다. 다른 사람의 손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준혁은 알았다.
이 손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 · ·
그날 새벽, 준혁은 일을 마치고 곧장 집으로 가지 않았다.
그는 학교 뒷산으로 향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다. 산 입구는 인적이 없었고, 새벽 공기는 차고 축축했다.
준혁은 확인하고 싶었다.
편의점에서의 그 일이, 아드레날린이 만든 착각이었는지. 아니면—
진짜인지.
그는 등산로 입구에 섰다. 정상까지는 가파른 오르막. 평소 같으면 숨이 턱까지 차오를 길이었다.
준혁은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천천히. 다리의 감각을 살피면서.
그런데 속도를 올릴수록,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몸이 가벼워졌다.
경사가 가팔라질수록, 숨이 차오르기는커녕 발걸음이 더 안정됐다. 오른발이 땅을 박찰 때마다, 몸이 예상보다 멀리 튀어 나갔다. 흙길의 돌부리도, 패인 곳도, 발이 알아서 피했다. 마치 다리가 길을 미리 읽고 있는 것처럼.
준혁은 멈추지 않았다.
오르막을 그대로 내달렸다. 나무들이 옆으로 빠르게 스쳤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는데, 그 폐는 전혀 타들어가지 않았다.
정상에 도착했다.
준혁은 핸드폰 대신, 편의점에서 챙겨 온 손목시계를 봤다.
산 입구에서 정상까지, 평소 이십 분 넘게 걸리던 길이었다.
시계 바늘은—
사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준혁은 정상에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발밑으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아직 잠든 회색 도시. 듬성듬성 켜진 가로등. 멀리, 동쪽 하늘이 옅게 밝아오고 있었다.
준혁은 숨을 골랐다.
아니—고를 숨이 없었다.
이십 분짜리 오르막을 사 분에 내달렸는데, 숨이 차지 않았다. 심장은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뛸 뿐이었다. 땀도, 거의 나지 않았다.
준혁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능력의 적중을 세 번 확인하고서야 인정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한 번의 경험으로 단정하고 싶지 않았다.
준혁의 시선이, 정상 한쪽에 놓인 운동기구로 향했다. 등산객들이 쓰는 낡은 철제 기구. 그 옆에 주먹만 한 돌들이 흩어져 있었다.
준혁은 그중 가장 큰 돌을 집어 들었다. 양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묵직한 돌이었다.
그는 그 돌을, 오른손 하나로 옮겨 쥐었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준혁은 그 돌을, 산 아래를 향해 가볍게 던졌다.
가볍게. 정말로 가볍게. 공을 던지듯 손목만 까딱했을 뿐이었다.
돌이 날아갔다.
준혁의 눈이 그 궤적을 좇았다. 돌은 포물선을 그리며 멀어졌고, 산 중턱의 어느 나무를 한참 지나서야, 까마득히 아래쪽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준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방금 그가 던진 돌은, 사람이 던질 수 있는 거리를 한참 넘어선 곳에 떨어졌다.
그는 자기 오른손을 다시 내려다봤다.
손은 멀쩡했다. 떨리지도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범한 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게 더 섬뜩했다.
준혁은 자기 두 손을 봤다. 두 발을 봤다.
오른쪽이었다.
전부, 오른쪽이었다.
트럭에 부딪힌 오른손. 충격을 받은 오른발. 그리고 안와골절을 입은 왼쪽 눈.
다친 자리마다, 무언가가 들어와 있었다.
눈에는 내일을 보는 힘이.
그리고 손과 발에는—
이 힘이.
· · ·
준혁은 산 정상의 너럭바위에 앉았다.
밝아오는 하늘을 보며, 그는 오래 생각했다.
겁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사람의 몸이 이래선 안 됐다. 한 손으로 스무 병들이 박스를 받치고, 이십 분 길을 사 분에 오르는 건—사람의 일이 아니었다. 준혁은 평생을 합리성에 기대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합리성은, 지금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먼저 든 감정이 따로 있었다.
차분함이었다.
준혁은 그 차분함의 정체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는 묻고 있지 않았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그런 질문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질문은, 평범한 삶을 살던 사람이 갑작스러운 불행 앞에서 던지는 거였다.
준혁의 삶은, 애초에 평범하지 않았다.
일곱 살에 아버지가 떠났고, 열네 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친척들은 차례로 등을 돌렸다. 열네 살부터 준혁은 혼자였다. 옥탑방, 새벽 알바, 라면 반 개로 나눈 두 끼. 그게 그의 삶이었다.
그런 준혁에게 세상은, 한 번도 친절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준혁이 던지는 질문은 왜 나에게가 아니었다.
준혁이 던지는 질문은, 늘 하나였다.
그래서, 이걸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게 가난한 열일곱이, 살아남기 위해 익힌 사고방식이었다. 주어진 패가 좋든 나쁘든, 한탄하지 않는다. 그저 그 패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계산한다.
그리고 지금—
준혁의 손에는, 처음으로 좋은 패가 들려 있었다.
내일을 보는 눈.
무게를 느끼지 않는 손.
지치지 않는 발.
준혁은 자기 오른손을 천천히 폈다 쥐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산 아래 회색 도시 위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번지기 시작했다. 준혁은 그 도시를 내려다봤다. 늘 그를 밀어내기만 했던 도시. 한 번도 그의 편이었던 적 없는 도시.
그 도시가, 오늘 아침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다 뜨기 전에 집에 가야 했다. 씻고, 교복을 다리고, 학교에 가야 했다. 능력이 생겼다고 해서, 월세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늘 당장의 삶은, 어제와 똑같이 굴러갈 것이었다.
하지만 준혁은 알았다.
오늘부터,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것을.
그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리막을 달리며, 준혁은 한 가지를 결심하고 있었다.
이 능력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지민에게도. 학교에도. 그 누구에게도.
힘은, 알려지는 순간 표적이 된다. 그건 준혁이 가난을 통해 일찌감치 배운 진실이었다. 가진 것이 드러나면, 빼앗으려는 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빼앗으려는 자는, 늘 가진 자보다 수가 많았다.
준혁은 또 하나를 생각했다.
이 힘은, 조심해서 다뤄야 했다.
스무 병들이 박스가 종이처럼 가벼웠다. 주먹만 한 돌이 산 아래까지 날아갔다. 그렇다면 이 손이, 사람에게 닿으면—
준혁은 그 생각의 끝을 따라가다, 잠깐 걸음을 늦췄다.
힘을 가졌다는 건, 힘을 참는 법도 같이 익혀야 한다는 뜻이었다. 휘두르는 것보다, 멈추는 것이 더 어려운 힘. 준혁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러니 이 힘은—
철저히 숨기고, 함부로 쓰지 않는다.
준혁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능력이 생겼다고 해서, 그가 세상을 향해 달려들 생각은 없었다. 영웅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준혁이 원하는 건 단순했다. 월세가 밀리지 않는 삶. 끼니를 거르지 않는 삶.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는 삶.
그 작고 평범한 삶을, 이 능력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거면 충분했다.
아직 그는 알지 못했다.
그 결심이,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으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험대 위에서, 준혁이 다시 만나게 될 얼굴이—
학교 복도에서 1학년 아이의 가방을 뒤지던, 바로 그 얼굴이라는 것을.
· · ·
4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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