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 (龜裂)
5화 — 골목
· · ·
준혁은 그 골목을, 미리 봤다.
전날 밤, 눈을 감았을 때였다. 어둠 속에 떠오른 장면. 학교가 끝난 뒤의 좁은 골목. 준혁이 집으로 돌아갈 때 늘 지나는 그 길. 그 길목에 서 있던 여러 명의 그림자.
그래서 준혁은, 다음 날 그 골목을 향해 걸어가면서—
놀라지 않았다.
방과 후의 햇빛이 골목 입구에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다. 좁고 막다른 길이었다. 한쪽은 빌라 담벼락, 다른 쪽은 셔터 내린 가게들. 사람이 드물게 다니는, 준혁이 집까지 가는 시간을 아끼려고 늘 질러가던 지름길.
그 골목 안에, 박성재가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다섯이었다. 박성재, 그리고 그의 패거리 넷. 어제 복도에서 미끄러졌던 김재호도 그 안에 있었다.
준혁은 골목 입구에서 걸음을 멈췄다.
돌아갈 수 있었다. 다른 길로 가면 됐다. 십 분쯤 더 걸리겠지만, 그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준혁은 잠깐, 그 합리성을 저울에 올렸다.
그리고 내려놨다.
오늘 이 골목을 피하면, 박성재는 내일 다른 골목에서 기다릴 거였다. 모레는 또 다른 곳에서. 이런 부류는, 표적이 한 번 도망치면 끝까지 쫓는다. 도망은 해결이 아니라, 미루는 것일 뿐이었다.
준혁은 그것을, 오래전에 몸으로 배웠다.
피할 수 없는 빚은, 빨리 갚는 게 낫다.
준혁은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왔네."
박성재가 담벼락에서 등을 떼며 말했다.
그의 손목에는, 어제 준혁이 쥐었던 자국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상처는 없었다. 그런데도 박성재는, 그 손목을 한 번 천천히 돌려 보였다. 마치 어제의 일을 잊지 않았다는 듯이.
"어제 학교에서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나 우습게 만들었지."
박성재의 목소리는 낮았다.
"근데 여긴 보는 사람 없어."
패거리 넷이 천천히 준혁을 둘러쌌다. 골목은 좁았고, 다섯이 자리를 잡자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준혁은 그 한가운데에 서서, 다섯을 차례로 봤다.
그의 표정은, 어제 복도에서와 똑같았다. 다섯에게 둘러싸였는데도, 분노도 두려움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준혁의 눈이 다섯의 위치를 읽었다. 누가 먼저 움직일지. 어느 방향에서 손이 날아올지. 왼쪽 눈이 보여주는 것인지, 단지 신경이 빨라진 것인지—그 경계는 여전히 모호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다섯의 움직임이 준혁에게는 느리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처럼.
"마지막으로 말할게."
박성재가 한 걸음 다가왔다.
"무릎 꿇고 빌어. 그럼 오늘은 적당히 끝내줄게."
준혁은 박성재를 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길을 막고 있잖아. 비켜줘. 나 갈 데 있어."
박성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그 말이 끝나기 전에, 김재호가 옆에서 달려들었다.
어제 복도에서 당한 것을 되갚으려는 듯, 가장 먼저, 가장 거칠게.
· · ·
준혁의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준혁은 어제 복도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능력을 쓰는 일보다, 능력을 참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것. 박성재의 손목을 부러뜨리지 않으려고, 그는 자기 손끝의 힘을 한 톨 단위로 다스려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상대가 다섯이었다.
다섯을 동시에 상대하면서, 그 다섯을 단 한 명도 다치게 하지 않는 것.
그게 준혁이 스스로에게 정한 규칙이었다.
이상한 규칙이었다. 자기를 때리러 온 자들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니. 하지만 준혁은 알았다. 자기 손에 실린 힘이 어떤 것인지. 한 번 잘못 휘두르면, 그건 싸움이 아니라 사고가 된다는 것을.
그래서 준혁은, 때리지 않기로 했다.
그저, 흘려보내기로 했다.
김재호의 주먹이 날아왔다.
준혁의 눈에, 그 궤적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준혁은 상체를 비틀어 주먹을 흘렸다. 그리고 김재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그가 달려온 힘 그대로 옆으로 보냈다.
김재호는 자기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담벼락 쪽으로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넘어지지는 않았다. 준혁이, 넘어지지 않을 만큼만 방향을 틀어줬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둘이 동시에 들어왔다.
준혁의 발이 움직였다. 한 명의 진로를 살짝 막아 두 사람의 동선을 엉키게 만들었다. 둘은 서로의 어깨에 부딪혀 한 박자 멈췄다. 그 한 박자 사이에, 준혁은 이미 그 사이를 빠져나가 있었다.
준혁의 머릿속에서는, 골목 전체가 하나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다섯의 위치. 다섯의 무게중심. 누가 다음에 어느 발을 디딜지. 좁은 골목 안에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빈틈과 겹침이, 준혁의 눈에는 미리 그려진 선처럼 보였다.
준혁은 그 선을 따라, 가장 힘이 덜 드는 길로만 움직였다.
한 명이 등 뒤에서 팔을 둘러 목을 조르려 했다. 준혁은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살짝 틀었다. 상대의 팔이 허공을 감쌌고, 준혁은 그 팔 아래로 가볍게 빠져나왔다.
또 한 명이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 했다. 준혁은 그 발이 오기 전에, 반 박자 먼저 발을 옮겼다. 상대의 발은 빈 바닥을 긁었다.
박성재의 패거리가 보기에, 준혁은 마치—
골목 안을,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주먹은 준혁을 스치기만 했다. 발길질은 허공을 갈랐다. 다섯이 한 명을 둘러쌌는데, 그 한 명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준혁도 그들을 때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준혁은 피하고, 흘리고, 방향을 바꿔줄 뿐이었다. 누구의 얼굴에도 주먹이 닿지 않았다. 누구도 바닥에 쓰러지지 않았다. 골목에서는 거친 숨소리와 헛친 주먹 소리만 가득했다.
그리고 준혁은, 그 와중에도 한 가지를 계속 의식하고 있었다.
힘이었다.
상대의 손목을 잡아 흘려보낼 때, 그 손목을 부러뜨리지 않을 만큼만. 어깨를 밀어 동선을 틀 때, 그 사람이 벽에 처박히지 않을 만큼만. 준혁은 매 동작마다, 자기 안의 힘을 한 톨 단위로 덜어내고 있었다.
그건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더 피곤한 일이었다.
때리는 건 쉬웠다. 참는 게 어려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치는 건 다섯 쪽이었다.
· · ·
박성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그의 패거리도 하나둘 동작을 멈췄다. 다들 어깨가 들썩였다. 땀이 흘렀다.
그리고 준혁은—
골목 한가운데, 처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숨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땀도 나지 않았다. 교복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마치 방금 다섯 명이 자기를 둘러싸고 주먹을 휘두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박성재의 눈에, 어제와 같은 감정이 떠올랐다.
당혹.
아니, 어제보다 더 깊은 무엇이었다.
박성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섯이 한 명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그 한 명은, 자기들을 단 한 대도 때리지 않았다. 맞아주지도 않았고, 때리지도 않았다. 그냥—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조용히 보여줬을 뿐이었다.
차라리 준혁이 자기들을 때려눕혔다면, 박성재는 분해서 다시 덤볐을 거였다. 하지만 준혁은 그러지 않았다. 때리지 않음으로써, 박성재에게 더 분명한 말을 하고 있었다.
너희는, 나에게 위협이 안 된다.
그 말은, 주먹보다 무거웠다.
준혁은 그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평온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박성재는 준혁을 노려봤다.
"…너 뭐야. 사람이 아니야, 너."
준혁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만 말했다.
"나 건드리는 데 너희 다섯이 다 필요했어. 그리고 다섯이서도 안 됐어. 다음에 또 올 거면, 그때는 몇 명을 데려와야 할지 잘 생각해봐."
그건 협박이 아니었다.
계산이었다. 박성재 같은 부류가 가장 잘 알아듣는 언어, 손익. 준혁은 자기를 건드리는 일이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라는 걸, 박성재의 셈법에 정확히 입력해주고 있었다.
박성재는 한참 동안, 준혁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 침을 한 번 뱉었다.
"…가자."
패거리를 데리고, 박성재는 골목을 빠져나갔다.
준혁은 그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준혁은, 자기 오른손을 천천히 폈다 쥐었다.
한 번도, 휘두르지 않은 손이었다.
· · ·
그날 새벽, 준혁은 편의점 카운터 안에 서 있었다.
방과 후 골목에서의 일을 겪고, 집에 들러 잠깐 눈을 붙인 뒤 나온 참이었다. 편의점의 새벽 두 시는, 어제와 똑같이 조용했다.
준혁은 텅 빈 거리를 창 너머로 보며, 낮의 일을 되짚었다.
그는 다섯을 상대했고, 다섯 중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그게 준혁에게는, 박성재를 때려눕히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능력은 무서운 물건이었다. 한 손으로 사람의 손목을 부러뜨릴 수 있고, 발 한 번에 사람을 날려버릴 수 있는 힘.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이 화를 내면, 그건 더 이상 싸움이 아니었다. 그건 일방적인 파괴였다.
그래서 준혁은, 자기 자신에게 한 가지를 약속했다.
이 힘으로, 사람을 망가뜨리지 않는다.
막을 수는 있어도, 부수지는 않는다.
준혁은 그 약속을, 골목에서 처음으로 지켰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섯에게 둘러싸여 주먹이 날아드는 와중에, 단 한 번도 받아치지 않는 것. 화가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김재호가 등 뒤에서 목을 감으려 했을 때, 준혁의 안에서도 무언가가 욱하고 솟았다. 손에 힘을 조금만 풀면, 이 다섯을 골목 바닥에 눕히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준혁은, 그 욱하는 마음을 눌렀다.
힘을 가진 사람이 화를 못 참으면, 그건 사고가 된다. 준혁은 그 경계를 넘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넘으면, 다음엔 더 쉽게 넘게 될 테니까.
준혁은 컵라면 하나를 꺼내, 뜨거운 물을 부었다.
면이 익기를 기다리며, 그는 창밖을 봤다.
새벽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만이 텅 빈 도로를 비추고 있었다.
늘 보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제까지의 준혁은, 이 도시에서 가장 약한 사람 중 하나였다. 가진 게 없었고, 기댈 곳이 없었고, 누가 밀면 밀리는 사람이었다.
오늘의 준혁은, 달랐다.
다섯이 둘러싸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이 도시의 어지간한 위협 정도는 손끝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준혁을 들뜨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준혁은, 조금 더 무거워졌다.
강해진다는 건, 더 많은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약할 때는 그저 피하면 됐다. 강해진 지금은, 피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매 순간, 자기 힘을 어디까지 쓸지 정해야 했다.
준혁은 컵라면 뚜껑을 열었다.
김이 얼굴로 올라왔다. 따뜻했다.
그는 천천히, 한 젓가락을 떴다.
그날 밤, 준혁은 알지 못했다.
박성재라는 작은 골목의 일이, 사실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머지않아, 준혁의 능력이—옥탑방과 학교와 편의점이라는 좁은 세계를 넘어, 훨씬 더 큰 곳을 향하게 된다는 것을.
그 큰 세계가, 준혁을 향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준혁은 아직, 그것을 보지 못했다.
· · ·
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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