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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 시즌1

[웹소설] 균열(龜裂) 2화 — 눈을 감으면 | 무료 연재 현대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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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 (龜裂)

2화 — 눈을 감으면

· · ·

의사는 차트를 손에 든 채, 준혁의 침대 옆에 섰다.

4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피곤이 눈가에 얇게 깔려 있었지만, 준혁을 보는 눈만은 또렷했다.

"깨어났네. 다행이야."

준혁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오른쪽 어깨가 묵직하게 당겼다.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로 끝난 게 기적이야."

의사가 차트를 넘기며 말했다.

"대형 트럭에 정면으로 부딪혔어. 보통은… 보통은 이렇게 멀쩡하게 깨어나서 대화하기 어려워. 갈비뼈 두 개 골절, 왼쪽 눈 주변 안와골절. 그게 다야. 머리도, 장기도, 큰 손상이 없어."

준혁은 그 말을 들으며 자기 몸을 다시 가늠해봤다.

붕대는 분명 오른쪽 곳곳에 감겨 있었다. 그런데 의사 말처럼, 통증이 그 부상에 어울리지 않게 옅었다. 마치 누가 아픔의 음량을 절반쯤 줄여놓은 것 같았다.

"그 학생, 도로에서 아이를 밀치고 대신 부딪힌 거지?"

의사가 물었다.

준혁은 짧게 답했다.

"네."

"그 아인 무릎 좀 까진 거 말곤 멀쩡해. 부모가 다녀갔어. 계속 학생 얘기를 하더라고."

준혁은 그 말에 잠깐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 아이가 살았다.

그거면 됐다고, 준혁은 생각했다. 다른 건 다 그다음 문제였다.

"보호자 연락처를 받아야 하는데."

의사가 차트를 보며 말했다.

"부모님은—"

"안 계세요."

준혁의 대답은 빠르고 건조했다. 망설임이 없었다. 망설일 일이 아니었으니까.

의사의 펜이 잠깐 멈췄다.

병실에 짧은 침묵이 떨어졌다.

"…그래."

의사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차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치료비는 걱정 안 해도 돼. 그 아이 부모가 다 부담하겠다고 했어. 본인들이 먼저 그러더라고."

준혁은 천장을 봤다.

다행이었다.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트럭에 부딪힌 그 순간조차, 준혁의 머릿속을 스친 건 병원비 걱정이었으니까. 가난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사람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틀 정도 더 지켜보고, 큰 이상 없으면 일반 병실로 옮길 거야. 푹 쉬어."

의사가 나갔다.

준혁은 혼자 남았다.

병실은 조용했다. 링거액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 복도에서 멀어지는 발소리. 창밖에서 해가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준혁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붕대 너머로, 그 안쪽이 여전히 뜨거웠다.

오른손이. 오른발이. 그리고 붕대 감긴 왼쪽 눈이.

사고의 순간 끓어올랐던 그 감각이, 사흘이 지나도록 식지 않았다. 아니, 식지 않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 뜨거움은 무언가를 천천히 빚어내고 있었다. 준혁이 모르는 사이에.

준혁은 그게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날 밤이 되어서야, 그는 처음으로 알게 된다.

· · ·

밤이 깊었다.

병실 불은 꺼져 있었다. 복도의 희미한 비상등 불빛만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준혁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몸은 분명 지쳐 있었다. 그런데 머릿속이 깨어 있었다. 사고의 장면이, 떨어지던 4미터가, 트럭의 은색 범퍼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려고. 그저 그뿐이었다.

그런데—

눈을 감은 어둠 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처음엔 흐릿했다. 잠들기 직전에 보이는 잔상 같은 것. 준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피곤한 사람의 머릿속에는 별게 다 떠오르니까.

그런데 그 흐릿한 것이, 가만히 들여다보자—

또렷해졌다.

장면이었다.

병실 문이 열린다. 아침 햇빛이 든 병실. 한 여자아이가 들어온다. 교복을 입은 아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다. 도시락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울었구나. 준혁은 어둠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저 아이가 울었구나.

오지민이었다.

준혁은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병실은 그대로였다. 어두웠고, 조용했고, 링거액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아침도, 햇빛도, 지민도 없었다.

꿈이었나.

아니었다. 준혁은 자고 있지 않았다. 분명히 깨어 있었다. 눈을 감았다가, 무언가를 봤고, 다시 눈을 떴을 뿐이었다.

준혁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피곤해서 그런 거다. 사고를 당했고, 사흘을 누워 있었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거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려 했다.

그런데 설득이 잘 되지 않았다.

방금 본 장면은 너무 선명했다. 지민의 얼굴, 도시락의 모양, 부어오른 눈가의 결까지. 꿈이라기엔 디테일이 지나치게 또렷했다.

준혁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엔 잠을 청하려는 게 아니었다.

확인하려는 거였다.

어둠 속에서, 그는 집중했다. 방금 본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려고. 붙잡으려고.

장면이 다시 왔다.

병실 문이 열린다. 지민이 들어온다. 도시락. 부어오른 눈. 그리고 이번엔, 한 가지가 더 보였다.

창밖의 빛이었다. 아침의 햇살. 그 각도와 밝기가, 준혁의 머릿속에서 시각으로 환산됐다.

오전. 열 시 무렵.

준혁은 눈을 떴다.

오래도록, 천장을 봤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평생을 계산으로 살아온 사람.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았고, 증거 없는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 준혁이, 지금 한 가지 가설을 세우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내일 아침이면 알 수 있었다.

· · ·

준혁은 그 밤을 거의 새웠다.

잠이 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잠들기가 무서웠다. 잠들었다 깨어나면, 그 사이에 무언가가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방금 자기가 본 것이, 단지 아픈 사람의 헛것으로 끝나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깨어 있었다.

창밖이 천천히 밝아왔다. 검푸르던 하늘이 회색으로, 회색이 옅은 주황으로 바뀌었다. 도시가 깨어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차 소리, 사람 소리.

아침이 됐다.

간호사가 들어와 링거를 갈았다. 체온을 쟀다. 별다른 말 없이 나갔다.

오전 여덟 시.

아홉 시.

준혁은 병실 문을 응시했다.

그 문이, 언제 열릴지. 누가 들어올지. 그것만 생각하며.

아홉 시 반이 지났다.

준혁의 가설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역시 헛것이었나. 사고로 정신이 흐트러진 거였나.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보다는, 그냥 다친 사람인 편이 나았으니까.

그때였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빠른 발소리. 누군가 서두르는 발소리.

병실 문이 열렸다.

준혁은 숨을 멈췄다.

문 앞에 선 것은—

오지민이었다.

교복 차림이었다. 손에는 보자기에 싼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 모양과 크기가, 도시락이었다.

그리고 지민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야."

지민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너 깨어났다고… 어제 병원에서 학교로 연락 왔는데… 나 어제 하루 종일…"

지민은 말을 잇지 못했다. 도시락을 든 손이 살짝 떨렸다.

준혁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지민의 말을 절반밖에 듣지 못하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있었다.

오전 열 시 십사 분.

준혁이 어젯밤, 어둠 속에서 봤던 바로 그 시각이었다.

· · ·

"…준혁아?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지민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준혁의 표정이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준혁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의사 부를까? 너 얼굴이—"

"괜찮아."

준혁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적어도, 차분하게 들리도록 만들었다.

지민은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보다가, 도시락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놨다.

"엄마가… 너 깨어났다니까 새벽부터 일어나서 쌌어. 계란말이 들었어. 너 좋아하잖아."

준혁은 그 도시락을 봤다.

어젯밤 어둠 속에서 봤던, 그 도시락이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민은 그 침묵을 준혁이 아파서 그런 거라고 여겼는지,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학교 이야기, 사고 소식이 어떻게 퍼졌는지, 반 애들이 뭐라고 했는지.

준혁은 그 말들을 들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른 것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젯밤, 그는 눈을 감고 무언가를 봤다.

병실 문이 열리고, 지민이, 도시락을 들고, 부은 눈으로, 오전 열 시 십사 분에 들어오는 장면.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지금, 그대로 일어났다.

하나도 틀리지 않고.

우연일 수 있을까.

준혁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민이 병문안을 오는 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도시락을 싸 오는 것도. 친구가 다쳤다는 소식에 우는 것도.

하지만 시각까지는 아니었다.

열 시 십사 분. 그 분 단위까지 맞아떨어지는 건, 예측이 아니었다.

그건—

본 거였다.

준혁은 자기 왼쪽 눈에 감긴 붕대로,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붕대 안쪽이, 아직도 미세하게 뜨거웠다.

사고의 순간, 트럭이 들이받은 그 자리. 충격이 스치고 끓어올랐던 그 자리.

그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나 있었다.

· · ·

지민이 돌아간 뒤, 준혁은 다시 혼자가 됐다.

그는 침대에 누워, 오래도록 생각했다.

믿어야 할까. 믿지 말아야 할까.

준혁은 결론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한 번의 적중으로 무언가를 단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었다. 두 번이라면 다시 생각해볼 일이고, 세 번이라면—그땐 인정해야 했다.

그래서 준혁은, 실험하기로 했다.

그날 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엔 두려움이 덜했다. 두려움 대신, 차가운 호기심이 있었다. 준혁이 평생 무기로 삼아온 그 합리성이, 이번엔 이 말도 안 되는 능력을 향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집중했다.

내일.

내일을 보여줘.

장면이 왔다.

흐릿하게, 그리고 점점 또렷하게.

병실. 아침. 회진을 도는 의사. 그 의사가 차트를 보며 하는 말. 입 모양이 보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점심 무렵, 옆 병상에 새 환자가 들어온다. 노인이었다. 휠체어를 탄.

준혁은 눈을 떴다.

그 두 가지를 머릿속에 또렷이 새겼다.

의사의 회진. 옆 병상의 노인.

그리고 다음 날—

두 가지 다, 일어났다.

의사는 어제 준혁이 입 모양으로 읽은 그 말을 그대로 했다. 점심 무렵, 옆 병상에 휠체어를 탄 노인이 들어왔다.

준혁은 침대에 누운 채, 오래도록 천장을 봤다.

세 번이었다.

지민. 의사. 노인.

세 번 다 맞았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준혁은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감았다, 떴다.

눈을 감으면, 보였다.

내일이.

아직은 가까운 내일뿐이었다. 하루, 길어야 이틀. 흐릿하고, 소리도 없고, 보고 싶은 걸 마음대로 고를 수도 없었다. 그저 어둠 속에 잔상처럼 떠오르는 것을, 붙잡아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분명히, 보였다.

준혁은 자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왼손과 오른손.

왼손은 평범했다. 그저 한 사람의 손.

그런데 오른손은—

오른손을 가만히 쥐었다 폈다. 붕대 너머로, 그 안쪽이 여전히 뜨거웠다. 눈만이 아니었다. 트럭에 부딪힌 오른손도, 오른발도, 그 안에서 무언가가 끓고 있었다.

눈이 깨어났다면.

나머지 둘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뿐일지도 몰랐다.

준혁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창밖으로, 또 하루의 해가 지고 있었다.

퇴원까지는, 아직 열흘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열흘 안에, 준혁은 자기 오른손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처음으로, 알게 된다.

· · ·

3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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