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 (龜裂)
6화 — 머리
· · ·
박성재는, 다시 오지 않았다.
골목에서의 그날 이후, 박성재와 그의 패거리는 준혁을 멀리했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시선을 피했다. 준혁이 무섭다기보다는, 준혁이 '이해되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이해되지 않는 것을, 본능적으로 건드리지 않는다.
준혁은 그 거리감이 편했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났고, 준혁의 일상은 다시 잔잔해졌다. 새벽 알바, 학교, 다시 새벽 알바. 능력은 여전히 그의 안에 있었지만, 준혁은 그것을 거의 꺼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월요일 1교시, 수학 시험이 있었다.
준혁은 수학을 못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잘하지도 않았다. 딱 중간. 공부할 시간이 없는 학생의 평범한 성적이었다. 새벽에 일하고 낮에 수업을 듣는 사람에게, 따로 문제집을 풀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준혁은 별 기대 없이 시험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첫 문제를 읽는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 · ·
문제가, 분해됐다.
준혁의 눈앞에서, 시험지의 숫자들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문제를 읽으면, 풀이 과정 전체가 한꺼번에 머릿속에 펼쳐졌다. 식을 세우고, 변형하고, 답에 도달하는 그 모든 단계가—마치 누가 정답을 미리 귓가에 속삭여주는 것처럼, 한 호흡에 다가왔다.
준혁은 펜을 멈췄다.
잠깐, 자기 머릿속을 들여다봤다.
2번 문제. 함수의 최솟값을 구하는 문제였다. 보통이라면 식을 세우고, 미분하고, 계산해야 했다. 그런데 준혁의 머릿속에는, 그 과정이 이미 다 끝나 있었다. 답이 먼저 와 있었고, 풀이는 그 답을 설명하기 위해 뒤따라왔다.
준혁은 천천히, 그 풀이를 답안지에 옮겨 적었다.
3번. 4번. 5번.
마찬가지였다.
경우의 수, 수열, 도형. 어떤 유형이든, 문제를 읽는 순간 구조가 보였다. 어디가 함정이고, 어디가 핵심인지. 출제자가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지까지.
준혁은 펜을 움직이며, 한편으로는 차갑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도, 능력이었다.
눈이 미래를 보고, 손과 발이 강해진 것처럼. 트럭에 부딪힌 그 사고는, 준혁의 머리에도 무언가를 남겨놓았다. 사고 직후 병실에서, 통증의 음량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 같다고 느꼈던 그 순간부터—어쩌면 머리는, 가장 먼저 달라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준혁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준혁은 한 가지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는 가장 어려운 마지막 문제, 변별을 위해 출제된 6점짜리 문제로 시선을 옮겼다. 보통의 학생이라면 한 문제에 십 분도 더 매달려야 할, 그런 문제였다.
준혁은 그 문제를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문제의 조건들이 따로따로 떠올랐다. 준혁의 머리는 그 조건들을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처럼 다뤘다. 이리저리 돌려보고, 겹쳐보고, 순서를 바꿔보고. 어느 조건과 어느 조건을 이으면 길이 열리는지가, 한눈에 보였다.
준혁은 눈을 떴다.
풀이가, 머릿속에 완성돼 있었다.
걸린 시간은 채 일 분도 되지 않았다.
이건 단순히 머리가 좋아진 정도가 아니었다. 준혁은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머리는 이제, 복잡한 것을 복잡하지 않게 보는 머리였다. 엉킨 실타래를 보면, 어느 가닥을 당겨야 풀리는지가 먼저 보이는 머리.
50분짜리 시험을, 준혁은 8분 만에 다 풀었다.
그리고 펜을 내려놓으려다, 멈췄다.
준혁의 머릿속에서, 다른 계산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준혁은 시험지를 다시 봤다.
지난 시험에서 그의 수학 점수는 60점대였다. 그런데 이번에 채점하면, 100점이 나올 거였다. 8분 만에 푼 답에는, 틀린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한 과목이 60점대에서 100점으로.
그건 너무 컸다.
준혁은 능력에 대해 정한 첫 번째 원칙을 떠올렸다. 능력은 알려지는 순간 표적이 된다. 갑자기 만점을 받는 학생은, 눈에 띈다. 선생이 의심하고, 아이들이 수군거린다. 준혁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준혁은 답안지를 다시 들여다봤다.
그리고, 일부러 두 문제의 답을 고쳤다.
아주 어려운 문제 둘. 틀려도 자연스러운 문제 둘을 골라, 답을 살짝 어긋나게 바꿔 적었다.
100점이 아니라, 90점쯤.
'공부를 좀 했나 보다' 소리는 들어도, '이상하다' 소리는 듣지 않을 점수.
준혁은 그제야 펜을 내려놓았다.
능력을 숨기는 일에는, 이런 종류의 계산도 포함돼 있었다. 너무 강해 보여서도 안 되고, 너무 갑작스러워서도 안 된다. 준혁은 자기 점수마저, 조율해야 하는 사람이 됐다.
이상한 일이었다.
능력이 생겼는데, 그 능력을 마음껏 쓰는 게 아니라—드러나지 않게 깎아내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한다니.
그래도 준혁은, 그 계산을 멈추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8분 동안, 준혁의 머릿속에서는 수학 시험 말고 다른 것이 함께 굴러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훨씬 더 중요한 계산이었다.
· · ·
그날 밤, 준혁은 옥탑방 책상 앞에 앉았다.
핸드폰 화면을 켰다. 사고 때 박살 난 핸드폰 대신, 중고로 싸게 구한 낡은 기종이었다. 화면 한쪽에 금이 가 있었지만, 인터넷은 됐다.
준혁은 검색창에 한 줄을 입력했다.
고등학생 온라인 과외 시급.
화면에 숫자들이 떴다.
준혁의 머리가, 그 숫자들을 빠르게 분류하기 시작했다.
편의점 새벽 알바. 시급 만 원 남짓. 하루 네 시간. 한 달을 꼬박 채워도, 월세를 내고 공과금을 내면 손에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준혁은 3년 동안, 그 빠듯한 셈 안에 갇혀 살았다.
그 셈을 바꿀 방법이, 늘 없었다.
몸을 쓰는 일은, 시간을 파는 일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하루 스물네 시간으로 똑같았다. 더 벌려면 더 오래 일해야 했고, 더 오래 일하면 잠과 학교가 줄었다. 그게 가난의 구조였다. 빠져나갈 틈이 없는 구조.
그런데 오늘, 준혁은 처음으로 그 구조에 틈을 봤다.
머리였다.
준혁의 머리는 이제, 수능 수학을 8분에 푸는 머리였다. 그것도 출제 의도까지 읽어내면서. 그렇다면 준혁은, 시간을 파는 대신 다른 것을 팔 수 있었다.
지식을.
준혁의 손이, 화면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수능 수학 커뮤니티 하나를 찾았다. 학생들이 어려운 문제를 올리고, 풀이를 구하는 곳. 준혁은 그곳에 올라온 가장 어려운 문제 하나를 골랐다.
그리고 풀이를 적기 시작했다.
단순히 답만 적는 게 아니었다. 준혁의 머리는, 그 문제를 '왜 어렵게 느끼는지'까지 보고 있었다. 학생이 어디서 막힐지, 어떤 개념을 착각하고 있을지. 준혁은 그 막히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 가장 이해하기 쉬운 길로 풀이를 안내했다.
풀이 하나를 다 적는 데, 십오 분이 걸렸다.
준혁은 그 풀이를, '새벽풀이'라는 이름으로 게시판에 올렸다.
닉네임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풀이를 쓰는 시간이 늘 새벽이었고, 새벽이라는 단어에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학교도, 지역도, 나이도 드러내지 않는 말. 그러면서도 그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작은 표식 같은 것.
자기 얼굴도, 이름도, 학교 성적도 드러내지 않는 이름. 능력을 숨기면서도, 능력을 쓸 수 있는 방법. 준혁이 찾아낸 그 틈의 이름이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준혁은 잠깐 화면을 들여다봤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준혁은 지금까지, 자기가 가진 것을 누군가에게 내준 적이 거의 없었다. 가진 게 없기도 했지만, 가난은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 받는 것에는 익숙해도, 주는 것에는 서툴러진다. 지민의 계란말이를 받는 데 1년이 걸렸던 것처럼.
그런데 방금 준혁은, 자기 머릿속의 무언가를—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내놓았다.
그리고 그건, 손해가 아니었다.
준혁의 머릿속 풀이는, 내놓는다고 줄어들지 않았다. 백 명에게 나눠줘도 그대로 남았다. 가난의 셈법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가난 속에서는 모든 것이 한정돼 있었다. 라면 한 개를 둘로 나누면, 한 끼는 반으로 줄었다.
그런데 머리에서 나오는 것은, 나눠도 줄지 않았다.
준혁은 그 사실을, 오래 곱씹었다.
· · ·
다음 날 새벽, 편의점 카운터에서 준혁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어젯밤 올린 풀이에, 댓글이 달려 있었다.
이거 진짜 이해 잘 됨. 다른 문제도 풀어주실 수 있나요?
설명 미쳤다… 학원 강사보다 나음.
준혁은 그 댓글들을, 카운터의 흐릿한 형광등 아래서 한참 들여다봤다.
가슴이 뛰는 건 아니었다. 준혁은 좀처럼 들뜨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머릿속에서 숫자 하나가 또렷해졌다.
가능성.
준혁은 그날부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무료 풀이를 꾸준히 올려 '새벽풀이'라는 이름을 알린다. 그 이름에 신뢰가 쌓이면, 유료 과외로 연결한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화상 없는 음성 과외, 혹은 문제 풀이 영상. 시간당 단가는 편의점 시급의 몇 배가 될 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건, 시간을 파는 일이 아니었다.
준혁이 한 번 만든 풀이 영상은, 백 명이 봐도 천 명이 봐도 똑같이 남았다. 한 번 일하고, 여러 번 팔리는 구조. 가난의 구조에는 없던, 완전히 다른 셈법이었다.
준혁은 편의점 창밖의 텅 빈 새벽 거리를 봤다.
3년 동안, 준혁에게 미래라는 단어는 사치였다. 그가 셈할 수 있는 건 늘 '이번 달'까지였다. 다음 달 월세, 다음 주 끼니. 그 너머는 생각해봐야 막막하기만 해서, 아예 생각하지 않는 법을 익혔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준혁은 '이번 달' 너머를 보고 있었다.
여섯 달 뒤. 일 년 뒤.
그 자리에, 지금과는 조금 다른 삶이 놓여 있을지도 몰랐다.
준혁의 왼쪽 눈이, 습관처럼 찌릿했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는 건, 능력이 보여주는 내일이 아니었다.
능력과 상관없이, 준혁이 자기 손으로 그려보는 미래였다.
그 둘은, 다른 것이었다.
· · ·
그 주 금요일, 수학 시험 성적표가 나왔다.
준혁의 점수는 92점이었다.
일부러 두 문제를 틀린, 계산된 점수. 그런데 그 92점도, 준혁에게는 충분히 큰 숫자였다. 지난 시험이 60점대였으니까.
담임이 종례 후 준혁을 교무실로 불렀다.
담임 장철수 선생. 사십 대 중반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은 남자. 이 학교에 부임한 지 오래됐고,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일은 이미 접은 듯한 표정의 선생이었다.
"이준혁, 이번 수학."
장 선생이 성적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92점이야. 너 저번 시험 67점이었어."
"공부 좀 했어요."
준혁의 대답은 짧고 건조했다.
장 선생은 안경 너머로, 한참 준혁을 봤다. 그 시선에는 의심이 절반, 그리고—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가 절반 섞여 있었다.
호기심이었다.
"…그래. 다음 시험도 한번 그렇게 해봐."
장 선생이 성적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지켜볼게."
준혁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준혁은 방금 선생님의 눈에 스쳤던 그 호기심을 떠올렸다.
그건 작은 것이었다. 의심에 가까운, 아주 작은 관심.
하지만 준혁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 작은 관심이, 머지않아 준혁의 삶을 학교 밖으로—그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밀어 보내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작은, 선생님의 책상 서랍 안에 든 한 장의 종이라는 것을.
· · ·
7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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