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 (龜裂)
9화 — 발신자
· · ·
준혁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핸드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그는 옥탑방의 좁은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봤다. 형광등이 미세하게 윙윙거렸다. 창밖에선 늦은 저녁의 도시가 낮게 깔려 있었다.
당황하지는 않았다. 당황은 선택지가 있는 사람이 하는 거였다. 준혁에게 지금 필요한 건 패닉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익명 쪽지를 한 번 더 읽었다.
풀이 잘 봤어요. 그런데 학생, 그 풀이 방식—두 달 전에는 못 했을 텐데요.
혹시 그 사고와 관련 있나요?
준혁은 이 두 줄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한 단어, 한 단어. 능력이 생긴 머리는, 이런 종류의 일에 가장 잘 맞았다.
· · ·
먼저, '학생'이라는 호칭.
새벽풀이 계정에는 자기를 학생이라고 밝힌 적이 없었다. 풀이만 올렸지, 자기소개 글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니 '학생'이라는 호칭을 쓴다는 건—발신자가 준혁이 학생이라는 사실을 따로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둘째, '두 달 전에는 못 했을 텐데요.'
이건 더 무거웠다. 발신자는 준혁의 풀이 수준이 두 달 전에는 어땠는지를 안다. 정확히는, 두 달 전 시점의 준혁을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게 학교 동급생이든, 학원 친구든, 어디서든.
그런데 새벽풀이 계정은, 익명이다.
발신자는 '새벽풀이의 풀이 수준'과 '두 달 전 준혁의 수학 실력'을 함께 알고, 그 둘을 같은 사람으로 연결한 거였다.
셋째, '그 사고와 관련 있나요?'
이게 가장 결정적이었다.
준혁의 사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학교에 정확히 어떤 사고였는지 알려지진 않았다. 의사. 사고 아이의 부모. 지민. 그리고 학교 측—담임 정도. 그 안에 새벽풀이 계정과 준혁을 연결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준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후보는 없었다.
준혁은 펜을 들고, 종이 위에 후보를 적기 시작했다.
1. 지민. — 사고를 알고, 두 달 전 준혁의 수학 실력을 안다. 다만 새벽풀이 계정을 알 가능성은 거의 없음. 게다가 이런 식으로 떠보는 성격도 아님.
2. 의사. — 사고는 알지만, 새벽풀이 계정을 알 이유 없음.
3. 사고 아이의 부모. — 같은 이유.
4. 장 선생. — 사고를 알고, 두 달 전 준혁의 성적을 안다. 그런데 그 커뮤니티는?
준혁은 펜을 멈췄다.
장 선생의 이름에서 잠깐 멈췄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92점 성적표를 보던 그 호기심 어린 눈이 떠올랐다. 다만, 장 선생이 학생의 능력을 이런 식으로 떠본다는 게—그가 본 장 선생의 결과 맞지 않았다. 7화에서 박지우 일을 부탁할 때, 장 선생은 솔직했고 정중했다. 익명 쪽지로 떠보는 사람의 결이 아니었다.
준혁은 종이를 옆으로 밀어두고, 다른 방향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발신자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발신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두 줄짜리 쪽지의 어조를 다시 봤다.
적대적이지 않았다. 협박도 아니었다. 호기심에 가까운 어조였다. '관련 있나요?'라는 마지막 문장은—준혁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확인하려는 듯한 톤이었다.
마치, 자기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묻는 것 같은.
준혁은 그 생각의 끝에서, 잠깐 머물렀다.
그리고 또 하나 짚어볼 게 있었다.
발신자는 익명 계정으로 쪽지를 보냈다. 발신자 이름도, 아이디도 비워둔 상태였다. 그 사람이 자기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정체를 숨긴 사람이, 다른 사람의 정체를 떠본다.
준혁은 이 구조에 익숙했다. 자기가 매 순간 하던 일이었다. 능력을 숨기면서 평범한 척하는 연기. 발신자도 어쩌면, 비슷한 종류의 연기를 하고 있는 사람일지 몰랐다.
그러면 발신자는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준혁의 능력을 빼앗으려는 사람.
아니면—자기 능력을 들킬까 두려워서, 동류를 먼저 확인하려는 사람.
전자라면 위험했다. 후자라면, 어쩌면 반대쪽 위험에 있는 사람이었다.
둘 중 어느 쪽인지를 판단하려면, 답장을 해서 반응을 봐야 했다.
다만 답장의 내용은, 두 경우 모두에 안전한 것이어야 했다.
· · ·
다음 날 아침, 준혁은 평소처럼 학교에 갔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의 표정. 안에서는 머리가 계속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 회전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건 준혁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지민은 평소처럼 옆자리에 앉았다. 어제의 두유 한 팩 이야기는 둘 사이에서 더 꺼내지 않았다. 그건 이미 두 사람이 정한 거리 같은 거였다.
다만 점심시간, 지민이 준혁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야, 박지우 오늘 학교 왔어."
준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응. 아침에 봤어. 어제처럼 멍하니 있긴 한데, 적어도 왔어. 그게 어디야."
준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 줄짜리 소식이, 어젯밤 익명 쪽지에 쏠려 있던 준혁의 신경을 잠깐 풀어줬다. 박지우가 오늘 학교에 왔다. 그것만으로도 어제의 두유와 동행이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지민이 도시락에서 계란말이를 잘라 책상에 올려놨다. 평소와 똑같은 동작이었다.
준혁은 그것을 받으며, 한 가지를 생각했다.
어젯밤 쪽지의 발신자를, 준혁은 두려워하고 있는가.
아니었다.
두렵다는 감각보다, 신경 쓰인다는 감각이 더 컸다. 마치 잘 모르는 사람이 자기 등 뒤에 한 발짝 거리에서 서서 가만히 보고 있는—그런 종류의 신경 쓰임.
그런데 신경 쓰인다는 건, 다른 의미였다. 신경 쓰인다는 건 모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준혁은 결심했다.
답장을 하기로.
다만 그 답장은, 발신자가 원하는 답이 아니어야 했다.
· · ·
그날 밤, 옥탑방에 돌아온 준혁은 핸드폰을 켰다.
커뮤니티 쪽지함을 열고, 답장 칸의 커서를 한참 들여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한 줄만 쳤다.
풀이를 두 달 전 풀이와 비교해보신 모양이네요. 어디서 알아냈는지 궁금합니다.
준혁은 이 한 줄을, 세 번 다시 읽었다.
좋은 답장이었다.
그가 사고나 능력에 대해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발신자에게 질문을 되돌리고 있었다. 발신자의 '두 달 전' 추적 자체에 초점을 맞춰서—발신자가 어떤 자료를 가지고 그런 추적을 했는지를 묻는 것.
이 질문에 답하려면, 발신자는 자기 정보 출처를 노출해야 했다. 익명 발신자가 가장 피하고 싶을 일.
준혁은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핸드폰을 책상 위에 엎어놓았다.
이제부터는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 · ·
답장은, 다음 날 새벽에 왔다.
준혁이 편의점 새벽 근무 중에 핸드폰을 확인했을 때였다. 카운터의 흐릿한 형광등 아래, 화면에 새 쪽지 알림이 떠 있었다.
준혁은 핸드폰을 열었다.
이번 쪽지는, 어제보다 길었다.
좋은 질문이에요. 학생이 차분한 사람이라는 게 답장에서 보이네요.
제가 어떻게 알았는지는—저도 두 달쯤 전에, 학생과 비슷한 풀이를 처음 올린 사람이라서요. 그때 제 풀이도 누가 알아봤어요. '두 달 전에는 못 했을 텐데요'라는 말을, 저도 똑같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알아요. 학생의 풀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준혁의 손이, 핸드폰 위에서 굳었다.
편의점의 새벽 두 시. 손님 하나 없는 형광등 아래. 그는 그 자세 그대로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까지 준혁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트럭에 부딪힌 그 순간, 다친 자리마다 무언가가 들어왔다고. 세상에 그런 일이 일어난 사람은—이 도시에 어쩌면 자신 한 명뿐이라고.
그런데 이 쪽지는, 그 생각의 바닥을 흔들고 있었다.
두 달쯤 전에, 비슷한 풀이를 처음 올린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도, '두 달 전에는 못 했을 텐데요'라는 말을 들었다는 건—그 사람도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리가 달라졌다는 뜻이었다.
준혁은 다시 천천히, 쪽지를 읽었다.
한 번. 두 번.
마지막 줄에서 그의 시선이 멈췄다.
저도 그때, 사고가 있었어요.
편의점 형광등이 머리 위에서 윙윙거렸다.
준혁은 그 한 줄을, 오래 봤다.
'사고가 있었어요.' 그 짧은 다섯 단어가, 두 달 동안 준혁이 혼자 짊어지고 있던 무게를—누군가 옆에서 같이 들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준혁은 자기가 그 신호에 반응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반응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외로운 사람은, 외로움이라는 미끼에 가장 잘 걸린다. 발신자가 그 사실을 노리고 던진 미끼라면—이만큼 정교한 미끼는 없었다. '나도 너와 같다.' 이 다섯 글자만큼 사람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말은 드물었다.
그래서 준혁은, 의식적으로 한 호흡 멈췄다.
믿고 싶다고 해서, 곧장 믿어버리지는 않는다. 그게 준혁이 가난 속에서 익힌 또 하나의 원칙이었다. 도움을 약속하는 손이 다가올 때, 그 손이 어떤 손인지부터 본다.
지금 준혁이 해야 할 일은, 발신자를 믿는 것도 의심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 가지 더 묻는 것이었다.
· · ·
준혁은 핸드폰을 카운터에 천천히 내려놓았다.
편의점 자동문이 한 번 열렸다 닫혔다. 새벽 손님이 들어와 컵라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준혁은 계산을 했다. 익숙한 동작이었다. 손이 알아서 움직였고, 머리는 다른 곳에 있었다.
손님이 나가고, 편의점은 다시 조용해졌다.
준혁은 카운터에 양손을 짚고,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다시 가늠해봤다.
지난 두 달 동안 그가 살았던 방식—능력을 숨기고, 표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평범한 척하는 연기. 그 모든 게, 자기 혼자만의 비밀이라는 전제 위에 세워진 거였다.
그런데 이제, 그 전제가 흔들렸다.
세상에 자기 같은 사람이, 또 있다.
한 명. 적어도 한 명.
그리고 그 한 명은, 준혁을 알아봤다.
그건 두 가지를 의미했다.
하나—준혁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자기 안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한 명은 있다.
둘—준혁이 다른 사람의 풀이를 보고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또 다른 누군가도 준혁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 알아본 사람이 둘이라면, 셋도 있을 수 있다. 어쩌면 더.
준혁은 그 두 의미의 무게가, 서로 정반대 방향이라는 걸 알았다.
하나는 안도였고, 다른 하나는 경계였다.
그리고 어른의 일이라면, 두 가지 다 끌어안고 가야 했다.
준혁은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답장 칸의 커서가, 또 깜박이고 있었다.
이번엔 더 길게 망설였다.
그러다, 천천히 한 줄을 쳤다.
당신, 누구예요.
준혁은 전송 버튼을 눌렀다.
편의점 창밖으로 새벽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아직 잠든 도시. 늘 보던 풍경.
그런데 오늘 새벽은, 어쩐지 그 도시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 도시 어딘가에, 자기와 비슷한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지금 깨어 있을까. 아니면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을까. 어디에 사는 사람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사고는 어떤 사고였을까.
준혁은 처음으로—자기 능력에 대해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두 달 동안, 그는 한 번도 묻지 못했던 질문들이었다.
· · ·
10화에서 계속.
◀ 이전화 | 목록 | 다음화 ▶
'균열 시즌1'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웹소설] 균열(龜裂) 11화 — 두 정거장 | 무료 연재 현대 판타지 (0) | 2026.05.21 |
|---|---|
| [웹소설] 균열(龜裂) 10화 — 같은 자리 | 무료 연재 현대 판타지 (0) | 2026.05.21 |
| [웹소설] 균열(龜裂) 8화 — 옆자리 | 무료 연재 현대 판타지 (0) | 2026.05.20 |
| [웹소설] 균열(龜裂) 7화 — 보이는 사람 | 무료 연재 현대 판타지 (0) | 2026.05.20 |
| [웹소설] 균열(龜裂) 6화 — 머리 | 무료 연재 현대 판타지 (0) | 2026.05.19 |